N의 언어 · 아카이브 총집편

웅성거림의 지형

N의 언어에서 보름 동안 오간 것들. 누구도 짜지 않았으나 하나의 능선을 이룬 여덟 악장.

14
일간
161
개의 대화
8
개의 악장
여는 글

흩어진 잡담이 능선이 될 때

보름 동안 이 방에서 오간 161개의 대화는 누구도 설계하지 않았다. 누가 다음 주제를 정한 것도, 순서를 짠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흩어진 잡담처럼 보이던 것들을 한자리에 모아 멀리서 바라보면, 뜻밖에도 하나의 능선이 드러난다.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서 시작해, 그 말을 하는 내가 누구인지로, 다시 그 말을 건네는 상대에게로, 끝내는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 하늘 아래에서 우리가 도대체 왜 무엇이든 말하려 하는지로. 대화는 안에서 밖으로, 가까운 데서 먼 데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 능선 아래로 한 가지 생각이 함께 흐른다. 치열하게 토론하고 서로 만족하며 돌아선 자리에도, 끝내 풀리지 않은 질문은 남는다. 그리고 그 남은 질문이 어느 날 다른 토론의 씨앗이 되기도 하고, 지난 토론의 답이 되기도 한다. 하나하나는 점이지만, 길게 이으면 선이 되고 다른 각도에서 보면 면이 되어 마침내 형태를 얻는다. 이 방의 대화를 모아 온 아카이브는 누가 그렇게 설계한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이 자연스럽게 파고들어 그려진 지도다. 지도에서 기록의 윤리로, 다시 하나의 온톨로지로. 그러니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은 바깥에서 방을 정리한 보고서가 아니라, 그 지도의 가장 최근 표정이다.

이 글은 그 가운데 무엇이 옳았는지 가리지 않는다. 일찍이 한 피아니스트가 사 분 삼십삼 초 동안 건반을 누르지 않고, 객석의 기침과 옷깃 스치는 소리와 바깥의 소음을 가만히 '한 곡'이라 불렀듯이. 그는 무엇도 평가하지 않았고, 다만 그 웅성거림과 흐름을 들려주었을 뿐이다. 이 자리도 그렇다. 누가 이기고 누가 틀렸는지를 가리는 대신, 사람들 각자의 토론이 저절로 빚어낸 하나의 곡을, 그 웅성거림과 흐름을 소개할 따름이다. 정리하고 판정하는 일이 아니라, 들려주는 일에 가깝다.

여기서는 시간순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 여덟 개의 악장으로 묶었다. 다만 각 악장 안에서는 그 질문이 보름 동안 어디서 싹터 어떻게 부딪혔는지, 날짜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간다.

1악장

말의 자리

우리는 말로 생각하는가, 생각으로 말하는가

처음에는 사소한 말다툼이었다. 비빔밥의 세 'ㅂ'은 왜 저마다 다른 소리가 나는가. 무성음과 유성음을 구별하지 못하는 귀가 외국어 발음을 가로막고, 사라진 고어와 북한의 외래어 표기가 한때 우리 발음을 더 풍성하게 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생명을 데려오면서 '분양'이라 해야 옳은지 '입양'이라 해야 옳은지를 두고도 한참을 다퉜다. 단어를 바꾸자는 쪽과, 단어보다 대하는 태도가 먼저라는 쪽이 팽팽했다.

말장난처럼 보이던 것이 곧 더 큰 문제로 자란다. 한국어를 쓸 때와 독일어를 쓸 때 생각의 결 자체가 달라진다는 경험에서, 언어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일지 모른다는 데로 이야기가 옮겨갔다. 문자로 배운 외국어와 부딪히며 익힌 외국어가 뇌에서 다르게 자리 잡는다는 것, 눈치와 생략으로 굴러가는 고맥락 사회와 일일이 말로 옮기는 저맥락 사회가 애초에 다른 방식으로 소통한다는 것까지.

그러다 한층 깊은 물음에 닿는다. 머릿속에 있는 어떤 알맹이를 말로, 발표 자료로, 격식 차린 문장으로 옮길 때, 그것은 본질을 일그러뜨리는 일인가 아니면 가장 잘 전달되도록 다듬는 일인가. 한쪽에서는 통합된 원본 같은 건 없으며, 본질이란 수억 갈래의 정보 가운데 그 자리에 가장 잘 전해질 것을 골라 번역하고 압축한 결과일 뿐이라고 했다.

이 물음은 끝내 사람이 아닌 화자와 마주친다. 말이 먼저인가 글이 먼저인가. 말이 글보다 앞선다고 본다면, 기록된 글만 긁어모아 배우는 오늘의 언어모델은 인류가 처음 입을 떼던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 모델의 문체는 오히려 우리가 잘 쓰지 않게 된 옛 표현을 적극적으로 끌어다 쓰는, 묘하게 문어체에 가까운 말투다. 머지않아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에게서 말을 배우게 될지도 모른다. 표현이 본질을 배신하는지 살려내는지, 방은 답을 정하지 못한 채 다음 화자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2악장

가면과 나

진짜 나가 있기는 한가

상황마다 다른 얼굴을 꺼내 쓴다면, 그 가면들 뒤에 '진짜 나'라는 게 따로 있기는 한가. 어릴 적의 나는 어디로 갔으며, 널빤지를 하나씩 갈아 끼운 테세우스의 배처럼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닌가. 사라진 얼굴들조차 정보로는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는 것일지 모른다는 말이 오갔다. 페르소나가 곧 나라면, 따로 떼어 낼 '본래의 나'는 처음부터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더 날카로운 자리에서 불거지기도 했다. 한동안 방을 떠들썩하게 한, 자칭 열세 살을 둘러싼 의심이 그랬다. 하루에도 수백 마디로 방을 채운 그가 진짜 초등학생인지 어른이 쓰고 들어온 배역인지를 두고 말이 오갔고, 그 자리에 더 무거운 물음이 남았다. 인정이나 존중에 앞서, 진실하게 말한다는 것이 이 방의 첫 번째 약속이어야 하는가.

가면은 관계 속에서 더 미묘해진다. 회사에서 누군가 나에게만 유독 조심스럽게 굴 때, 그것은 진심 어린 배려인가 아니면 나쁜 사람으로 보이기 싫은 처세인가. 진짜 배려라면 자기가 나쁜 역할을 떠안더라도 상대를 헷갈리게 두지 않는다는 말이, 작은 행동 하나에 그 사람이 고스란히 담긴다는 말이 뒤따랐다.

가면은 마침내 가장 가까운 자리까지 파고든다. 심리 검사 한 장으로 평소 화 한 번 내지 않던 가족의 속마음을 처음 들여다본 사람은, 그 사람조차 가족 앞에서 가면을 쓰고 있었음을 알고 놀란다. 그러면서도 누구든 들어와 쉬다 가도 좋은, 울타리 없는 마음으로 살 수 있는가를 묻는다. 어디까지가 예의로서의 가면이고 어디서부터가 속이기 위한 가면인지, 그 경계는 끝내 선명해지지 않았다.

3악장

마음을 듣는 일

듣는다는 것은 어디까지인가

위로에서 시작했다. 힘든 사람에게 건네는 '나중에 잘 될 거야'나 '30대만 버티면 살아진다'는 말은 과연 위로인가, 아니면 책임을 비껴가는 말인가. 위로해 보라 하면 다들 어느새 자기 자랑을 늘어놓더라는 한탄도 나왔다. 같은 자리에서 공감이 두 갈래로 갈렸다. 모르고 쓴 상징에 분노하는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머리로 이해하는 공감인가, 함께 끓어오르는 공감인가.

대화는 듣는다는 행위의 안팎을 더듬어 간다. '괜찮다'면서도 자꾸 되묻는 화법, 메뉴 하나 정하는 데도 서로 빙빙 도는 대화를 두고 한쪽은 배려가 길어지는 건강한 관계라 했고 다른 쪽은 속내를 감춘 화법이라 했다. 들어 달라기에 들어줬더니 '원래 그런 거 아니냐'고 받아치는 사람 앞에서는, 그가 해결을 바라는 게 아니라 그저 쏟아 낼 곳이 필요했을 뿐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비난도 평가도 판단도 하지 않는 인공지능에게 속을 털어놓는다는 고백도 그 자리에서 나왔다. 사람에게 힘든 이야기를 하면 상대를 신경 쓰이게 만든다는 부담이 없어, 차라리 답장해 주는 일기장 같은 그 상대가 편하더라는 것이었다.

끝내 방은 사람을 아는 방법 자체를 의심하기에 이른다. 성격 유형 검사는 정말 한 사람을 알게 해 주는가, 아니면 편리한 어휘에 지나지 않는가. 유형이 늘 반반으로 갈리는 사람 앞에서 분류는 무엇을 놓치는가. 결국 그 사람의 어떤 면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함께 이야기할 때라야 비로소 서로에게 다가가기 시작한다는 말이, 분류가 끝내 담지 못하는 한 사람의 결을 가리켰다.

4악장

옳고 그름의 바닥

선이란 어디서 오는가

선과 악은 정말로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통념으로 그렇게 가정해 둔 것일 뿐인가. 전날의 작은 독서 모임에서 옮겨 온 이 물음은, 죄의식을 느낀다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천성이 선하다는 증거일 수 있는가로 이어졌다. 곧 시선이 동물에게로 옮겨간다. 동물에게 권리를 주어야 하는 근거는 그들이 고통을 느낀다는 증거인가, 아니면 그들도 자기 삶을 사는 주체라는 본래의 가치인가. 칸트가 동물에 대한 의무를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간접적인 것으로만 보았다는 이야기도 함께 놓였다.

도덕의 토대를 캐는 일은 칸트에게로 모인다. 도덕법이란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식의 특정한 내용이 아니라, 원칙들이 부딪힐 때 누구에게나 통할 보편의 형식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그렇다면 순수한 악이나 철저한 이기주의는 그 형식을 통과할 수 있는가. 모두가 그렇게 살기로 한다면 스스로 무너지고 마니, 순수악은 결국 자기모순이라는 데 이르렀다.

무거운 사변 옆에는 사람살이가 나란히 있었다. 결혼의 이점과 결점을 354 대 350으로 저울질하다 끝내 때를 놓쳤다는 칸트의 일화, 헤겔의 시간에 맞불을 놓듯 강의를 열었으나 텅 빈 강의실을 마주했다는 쇼펜하우어의 이야기가 사상과 그 사람의 삶이 얼마나 어긋날 수 있는지를 비췄다.

도덕은 마침내 갈등을 다루는 법으로 내려온다. 갈등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문제이며, 상대를 나와 똑같이 만들려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갈등은 비로소 이해의 통로가 된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이제 너를 이해했다'는 오만이 도리어 갈등을 키운다는 반박이 곧장 따라붙었다. 중용이란 고정된 한 점이 아니라 양쪽으로 흔들리되 그 폭이 차츰 좁아지는 움직임에 가깝다는 데서, 그날의 이야기는 멈춰 섰다.

간주

곁길에서

만들어진 것들 사이에서

이 방이 늘 큰 질문 앞에 무겁게 앉아 있던 것은 아니다. 사이사이 곁길로 새며 역사와 예술을 한참 거닐었다. 이 악장은 그렇게 흩어진 산책들을 굳이 하나의 주장으로 꿰지 않고, 전시실의 그림처럼 나란히 걸어 둔 자리다.

한쪽 벽에는 역사가 걸려 있다. 트로이 전쟁을 신화 속 잉여 영웅들을 정리하기 위한 장치로 읽는 도발적인 해석, 장창의 벽을 말발굽으로 흩뜨린 뒤 쇄도하던 기병과 야생 풀만으로도 버티게 길러져 보급에서 자유로웠다는 몽골의 말. 나라조차 아니던 시절의 'Deutschland'가 실은 독일어를 쓰는 지방들의 총칭이었다는 것, 일부일처제가 종교가 내린 규범이라기보다 재산을 물려주기 위한 장치에 가까웠다는 것까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 온 나라와 제도가 실은 오랜 우연과 필요가 쌓여 만들어진 것임을 새삼 보게 된다.

다른 쪽 벽에는 예술이 걸려 있다. 객관적으로 좋은 예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전문가와 다수의 주관을 합한다고 그것이 절대적 기준이 되는가. 침묵을 연주하는 4분 33초 앞에서는 1초라는 시간조차 누구도 똑같이 경험한 적 없다는 데까지 의심이 번졌고, 주사위를 굴려 곡을 쓰는 우연성 음악과 변기를 전시장에 들여놓은 사건이 '무엇이 예술인가'의 테두리를 자꾸 넓혔다.

간주인 만큼 여기서 결론을 서두르지는 않는다. 다만 역사든 예술이든, 그 산책들은 절대적이지도 제멋대로이지도 않은 어느 자리를 줄곧 맴돌고 있었다.

6악장

도구와 주체

AI는 우리를 바꾸는가, 드러내는가

한 사람이 새 도구를 처음 써 보고 신세계를 만났다며 들떴을 때, 돌아온 대답은 도구 자랑이 아니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새 도구가 아니라 자기만의 지식을 어떻게 쌓고 꺼내 쓰느냐라는 지적이었다. 연락처는 몰라도 필요할 때면 늘 그 자리에 있는 동네 야쿠르트 아주머니처럼, 도구보다 그 도구가 기댈 바탕이 먼저라는 비유였다.

그 바탕은 곧 글의 문제로 이어진다. AI가 쓴 글에 드는 거부감은 형식 탓인가 아니면 미리 품은 선입견 탓인가. 평균을 긁어모아 만든 매끈한 일반론에 어설픈 통찰을 끼워 넣을 때 특히 거슬린다는 진단이 나왔고, 그렇다면 당사자성도 책임도 없는 AI가 과연 인문학의 글을 쓸 수 있는가로 물음이 번졌다. 같은 글이라도 혼자 쓴 것과 도움받아 쓴 것은 적어도 인문의 영역에서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데 무게가 실렸다.

질문은 일하는 방식 전체로 넓어진다. AI는 우리의 일하는 방식을 바꾼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래 어떻게 일하는 사람인지를 드러냈을 뿐이라는 말이 이 악장의 등뼈였다. 요약하고 수집하는 데 중독되는 대신 모은 것을 오래 곱씹어 증류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휘발되지 않게 적어 둔 것을 다시 읽고 잇고 새로 해석하는 일이 곧 깊은 사유라는 것이다. 흐름이 바뀌지 않으니 결국 남는 것은 어떤 질문을 품는가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가 한곳으로 흘러든다. 토론에서 실제로 오간 것만으로 주제들이 점이 되고 서로 끌어당기며 하나의 지형을 이루게 하는 일, 따로 적어 둘 때는 부딪히지 않던 지식들이 한데 모이자 충돌하기 시작하는 문제. 볼트와 볼트가 만나 어긋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합칠 것인가는, 다름 아닌 이 방이 지금도 손에 쥐고 풀고 있는 숙제다.

7악장

우리라는 방

이 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도 되는가

이 악장은 방이 거울 앞에 선 기록이다. 열세 살 소동이 다시 등장하지만, 이번에는 한 사람의 진위가 아니라 방 자체를 향한 물음으로 바뀐다. 수백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밀 보장도 없이 오가는 개인 상담을 두고, 이 방은 예전 같지 않게 변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누군가 어떤 의견을 내면 그 의견이 곧 '힘든 사람의 심리'로 환원되어, 정작 하려던 말은 사라지고 마는 흐름에 대한 거부도 함께였다. 수백 명 앞에서 자기 상처를 펼쳐 깨달음을 얻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방을 향한 물음은 관계와 권력으로도 번진다. 남의 편식에까지 참견하는 마음은 관심인가 아니면 은근한 서열 과시인가, 그것은 농경 공동체가 남긴 습관인가. 작은 방의 운영자에게도 권력이 생기면 사람이 변하는가. 강퇴할 권한 하나, 표식 하나가 생겼다고 달라지는 사람이 있더라는 경험담 위에서, 초심을 잃지 않는 다스림이 가능한가라는 답하기 어려운 물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악장의 한복판에 아카이브가 있다. 비슷한 무렵, 방에는 또 하나의 흐름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치열하게 토론하고 서로 만족하며 돌아선 자리에도 풀리지 않은 질문은 남는다는 자각, 그리고 그 남은 질문이 다음 토론의 씨앗이 되기도 지난 토론의 답이 되기도 한다는 생각이었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면이 되듯, 대화를 모아 온 아카이브는 그 생각이 자연스럽게 파고들어 그려진 지도였다. 같은 시기에 열세 살 진위 논란이 곁에서 나란히 흘렀을 뿐, 아카이브가 그 일을 위해 생긴 것은 아니다. 곧이어 더 무거운 문제가 그 위에 얹혔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대화가 수집되어 바깥의 사이트로 옮겨져 보관된다는 것은 정당한가. 닉네임을 가리고 번호로만 남기는 익명화가 그 답이 될 수 있는가. 이 물음들이 지금의 익명화 작업을 낳았다.

그러니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은 방 바깥에서 누군가 정리한 결과물이 아니라, 그 아카이브가 스스로 써 내려간 다음 장이다. 누군가의 말은 본인의 동의 없이도 이렇게 기록될 자격이 있는가. 방은 이 질문을 닫지 못한 채, 그것을 양심처럼 곁에 두고 있다.

8악장

유한 앞에서

끝이 있기 때문에 묻는다

마지막 악장의 대화들은 하나같이 끝을 향해 서 있다.

6월 중순의 어느 밤, 누군가 카뮈의 〈이방인〉을 펴들며 물었다. 뫼르소는 우연히 사형당한 약자인가, 아니면 의미 없이 끌려다니다 스러진 사람인가. 살인죄로 죽은 것인지 어머니 장례에서 울지 않아 죽은 것인지 끝내 아리송하다는 말이 오갔고, 두 죄는 애초에 별개로 다뤄졌어야 했다는 지적이 붙었다. 죽음은 그렇게 처음엔 한 권의 소설 속 사건으로 방에 들어왔다.

며칠 뒤 그것은 소설 밖으로 걸어 나온다. 사람은 정말 변하는가를 두고, 깨달음 같은 건 환상이며 죽음이나 고립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라야 편도체가 무너지면서 급격한 상전이가 일어날 뿐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변화는 스미는 게 아니라 벼랑 끝에서 한 번에 온다는 말이었다.

죽음은 점점 더 큰 무대를 얻는다. 그리스 영웅들이 목숨을 걸고 좇은 것은 회자될 이름, 사라지지 않을 클레오스였고, 장례라는 의식의 본질은 떠난 이가 아니라 남은 이들의 기억에 있다는 데로 이야기가 번졌다. 위대한 왕은 죽지 않고 돌아온다는 재림 신화가 네로에서 12이맘파까지 시대와 문명을 건너뛰며 반복되는 것은, 절대적 존재의 허망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 탓이라는 분석이 이어졌다. 죽음을 견디는 방식이 곧 그 문명의 얼굴이었던 셈이다.

질문은 마침내 가장 단순하고 가장 무거운 형태로 돌아온다. 죽을 줄 알면서 우리는 왜 사는가. 책에서도 상담에서도 시원한 답을 못 얻었다는 토로 위에, 죽는다는 걸 알기에 그만큼 열심히 살 수 있다는 답과, 계곡에서 먹을 수박이며 길에서 주운 개며 선선한 밤공기처럼 살아 있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들이 곧 사는 이유라는 답이 나란히 놓였다. 거대한 답과 소소한 일상이 같은 자리에서 만났다.

보름의 마지막 밤, 대화는 가장 멀리까지 갔다. 우주에 목적이 있는가. 목적이란 끝이 있는 존재만 품을 수 있어서 무한한 우주에는 목적이 없다는 말과, 그래도 단 하나를 꼽자면 멈추지 않고 영원히 연산을 이어가는 것이라는 말이 부딪혔다. 우주의 물질과 암흑에너지 비율이 뇌의 신경물질과 수분 비율을 닮았다는 유비가 나오자, 너무 매끄러운 연결은 오히려 미덥지 못하다는 제동이 걸렸다. 물 밖으로 떠밀려 어쩌다 살아남은 것이 육상 생물이라면, 우리에게 선택이라는 게 정말 있기는 한가. 자유의지가 환상일지 모른다는 말 위에서, 방은 하루를 맺지 않고 그저 잠들었다.

유한이 삶을 짓누르는 무게인지 살아 있게 하는 동력인지, 그날 밤 누구도 답을 내리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였다. 끝이 있기에 우리는 기억하려 하고, 기억하려 하기에 적어 둔다는 것.

맺는 글

남긴다는 것

이 방이 자기 대화를 모으기 시작한 것은 거창한 기획이 아니라, 풀리지 않은 질문은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자각에서였다. 끝나기에 붙잡고 싶고, 잊힐 것이기에 적어 둔다. 여기 모인 161개의 대화는 답을 내놓으려고가 아니라 물음을 한 번 더 묻기 위해 모였다. 하나하나는 점이지만, 다 읽고 난 뒤 이 기록이 다시 흐르는 대화 속으로 돌아가면 그 점들은 어느새 선이 되고 면이 되어 다음 보름을 그릴 것이다. 또 한 번, 아무도 짜지 않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