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이들의 향연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보상이 없어도, 밤마다 모여 인간과 세계를 묻는 사람들에 대하여.
토론 목록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 출처를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어느 대학의 철학 세미나 계획서인가, 독서 모임의 연간 주제인가. 아니었다. 한국어 오픈채팅방, 약 379명,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2주간의 대화였다. 공정하다는 착각, 노력도 타고난 운인가, 한 사람의 죽음과 수백만의 죽음이 왜 다르게 느껴지는가, 로제토 효과, 루 살로메… 나는 이 목록이 어떤 강의계획서보다 솔직하다고 느꼈다. 계획서는 '무엇을 배워야 한다'는 판단을 앞세우지만, 이 목록은 '무엇이 궁금하다'는 감각에서 시작했다. 그 차이가 작아 보여도 크다.
자격 없이 묻는 사람들
철학은 오랫동안 특정한 사람들의 것이었다. 여가가 있어야 했고, 글을 읽을 줄 알아야 했고, 교육을 받아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 노예와 여성과 외국인은 대화에서 제외됐고, 중세에는 성직자나 귀족의 몫이었다. 근대에 문이 넓어졌어도 철학은 강단에 앉아 있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웠다. 이 방의 사람들은 대부분 철학자가 아닐 것이다. 낮에 다른 일을 하고 밤에 모였을 것이다. 누구도 '공정이란 무엇인가'를 물을 자격을 부여한 적이 없다. 그냥 물었다. 어떤 질문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무엇이 옳은가의 물음은 그렇지 않다. 그건 모든 사람의 것이다.
공정하다는 착각, 노력이라는 신화
가장 오래 눈이 머문 토픽은 '공정하다는 착각'과 '노력도 타고나는 운인가'였다. 우리 시대의 가장 예민한 질문이다. 이긴 사람은 자기가 더 노력했다 여기고, 진 사람은 덜 노력했다 여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마이클 샌델이 파고든 것이 이것이다. 능력주의는 출발선이 같고 결과는 오직 능력과 노력으로 갈린다고 전제하는데, 첫 전제가 거짓이면 둘째도 무너진다. 이 방은 한 걸음 더 갔다. 끈기·회복력·만족을 미루는 능력 같은 '노력하는 힘'조차 유전과 양육의 산물이라면, 노력도 운의 영역에 들어온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내가 이룬 것의 상당 부분이 내가 고르지 않은 조건 덕이라면, 성취는 자랑이 아니라 빚이 된다. 빚진 사람은 갚으려 한다. 운을 아는 것이 곧 염치의 시작이고, 실패한 이를 향한 경멸 대신 연민이 들어설 자리가 거기서 생긴다.
평균은 그 누구도 아니다
'평균의 종말'을 이야기한 밤도 있었다. 우리는 한 사람을 MBTI 한 글자로, 사진 한 장으로, 평균 한 점으로 재단한다. 그러나 평균은 그 누구도 아니다. 한 사람 안에는 강한 자에게 모질고 약한 자에게 다정한 모순이 함께 산다. 파편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편리하지만 폭력이다. 우리가 파편밖에 보지 못하는 존재임을 아는 것, 그 한계의 자각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가른다.
로제토 효과와 비교라는 독약
로제토 효과를 다룬 토픽도 눈에 들어왔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이탈리아 이민자 마을 로제토는 식습관도 운동도 변변찮았는데 심장질환이 주변의 절반이었다. 비결은 긴밀한 공동체적 유대였다. 그런데 마을이 번영하면서 새 세대가 더 큰 집을 짓고 더 좋은 차를 사고 서로를 비교하기 시작하자, 심장질환 발생률이 평균으로 올라갔다. 단순한 '겸손해야 한다'는 교훈이 아니다. 비교가 관계의 언어를 바꾼다는 것이다. 동료를 경쟁자로 보는 순간 공동체가 허물어진다. 건강은 식단이 아니라 관계에서 왔고, 관계는 비교를 내려놓을 때 살아 있었다.
한 사람의 죽음과 수백만의 죽음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백만의 죽음은 통계'라는 말이 다뤄졌다. 죽음이 숫자가 될 때 우리는 무언가를 잃는다. 신문에 실린 한 아이의 사진이 거대한 통계보다 더 많은 사람을 움직인다. 이것을 그저 감정적 편향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아니라고 본다. 개별 인간을 숫자로 환원하지 않는 감각, 한 사람을 그 자체로 대하는 것 — 칸트가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 한 것이 바로 이 자리다. 도덕의 핵심이 거기 있다.
소통의 대화와 승부의 대화
우리 주변의 대화 중 상당수는 사실 승부다. 내 말이 맞다고 인정받으려는 욕망, 상대의 빈틈을 찾아 이기려는 것.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달랐다. 이기는 게 아니라 함께 더 잘 알게 되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래서 그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데서 지혜가 시작된다고 했다. 지식이 곧 지혜는 아니다. 이 방의 대화가 어느 쪽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 둘이 섞였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차이를 아는 사람들이 이 물음을 스스로 꺼냈다는 점이다.
죄와 벌, 그리고 역사 속의 우리
비행청소년의 죄와 벌을 다룬 토픽도 있었다. 우리는 왜 벌하는가. 복수심을 달래려고, 재범을 막으려고, 잘못을 확인하려고. 비행을 택하게 한 환경의 일부가 그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응징의 정당성은 좁아지고 속죄와 회복의 여지가 커진다. 앞서 말한 운과 노력의 문제와 그대로 이어진다. 그리고 누군가 헤겔을 인용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날개를 편다고. 지혜는 늘 뒤늦게 온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진보인지 퇴보인지 모른 채, 불완전한 정보로 선택하며 산다. 그 모름을 견디면서도 묻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의 태도다.
우상에서 이웃으로
철학자들의 사생활과 루 살로메를 다룬 밤도 있었다. 니체가 사랑했고 릴케가 사랑했고 프로이트가 벗으로 삼은 여성, 그러나 누구의 뮤즈이기 전에 자기 글을 쓴 사람. 위대한 사상가도 실은 감정에 상처받고 사랑에 흔들리고 판단을 그르치는 인간이었음을 아는 것은, 그 사상을 더 가까이 데려온다. 우상에서 이웃으로 내려올 때 오히려 더 배운다. 이런 이야기를 익명의 사람들이 나눴다는 것 자체가 이 방의 깊이를 보여준다.
마지막 밤
마지막 밤, 그들은 우주의 목적과 자유의지를 이야기하다 결론에 이르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이것이 실패인가.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철학의 임무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정확히 하는 것이라 했다. 우주에 목적이 있는지, 자유의지가 있는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부엉이가 아직 날지 않은 시간에 우리는 산다. 그 모름을 솔직히 인정하고 잠든 것이 나는 진실하다고 느꼈다. 풀리지 않은 질문은 사라지지 않고 각자의 방에 남아, 이튿날 밥을 먹다가 일을 하다가 불쑥 떠오를 것이다. 그것이 좋은 질문이 하는 일이다. 교양이란 정답의 목록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태도다.
이 방을 무어라 평가해야 할까. 평가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낮에는 밥을 팔고 코드를 짜고 아이를 키우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밤이면 모여 칸트를 논하고 한 사람의 죽음 앞에 오래 머문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보상이 없어도. 스스로 묻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조금 덜 무서워진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조금 덜 비관하게 된다.